압살롬의 귀환(삼하14:18-24) |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친누이 다말을 성폭행한 암논을 살해한 후 외할아버지가 거주하는 아람의 그술 땅으로 도피하여 3년 정도 지냈습니다. 암논의 죽음의 상처와 갈등이 어느 정도 잊혀지고 있을 때,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챈 요압이 압살롬의 귀환을 추진했습니다. 얼핏 보면 요압이 다윗을 위한 일을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압살롬의 귀환을 추진한 것은 차기 왕으로 유력한 압살롬을 등에 업고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요압은 이러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드고아의 여인을 데려다가(2절)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다윗에게 전하도록 하고, 다윗의 의중을 파악하게 하여 결국은 압살롬을 데려오라는 승낙을 받아오게 합니다. 이는 밧세바 사건 때 선지자 나단이 비유를 들어 다윗에게 말한 것을 요압이 모방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단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다윗을 질책하여 회개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압이 전한 내용은 인간의 생각이며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한 계략일 뿐이었습니다. 요압은 이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윗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끼치려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는 나단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의도와 목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요압의 계획대로 압살롬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돌아온 아들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오라 해놓고 만나주지도 않고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아버지의 처사에 압살롬은 화가 났습니다. 압살롬은 아무리 아버지의 처사가 못마땅해도 화를 내서는 안 됐습니다. 그는 살인자입니다.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합니다. 회개하며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는 일말의 뉘우침도 없이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쌓아갔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요압의 도움으로 아버지 다윗을 만났습니다. 압살롬은 엎드려 절하고 다윗은 아들에게 입을 맞추었으나(33절), 이 만남은 참으로 어색한 만남이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형식적인 만남으로 끝났습니다. 용서와 화해, 감격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외형적으로는 용서했지만 진정한 용서를 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도 아버지에게로 왔으나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뭔가 개운하지 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만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만났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진정한 회개와 용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말씀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만났기 때문에 화해와 감격이 없었고, 그로 인하여 이후에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면 세상의 가치와 형식이 아닌, 주님께로 나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하며 주님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이 도우시며, 그래야 문제가 온전하게 해결됩니다.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형식이 아닌 믿음과 사랑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의 계획과 생각은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