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눅19:28-40)

  예수님은 절기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는데 그 어느 때에도 나귀를 타거나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가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은 다른 때와 다른 모습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두 명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시면서 만약 주인이 왜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31) 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뤄졌습니다. 그때 나귀를 가지러 갔던 제자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신적 권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쳐주시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또 다른 제자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쓰신다고 말할 때, 그 나귀 주인은 그 뜻을 알아듣고 나귀 새끼를 순순히 풀어주었습니다. 이것은 나귀 주인이 주님이 누구인지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이 쓰시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풀어주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것을 내놓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쓰시겠다고 말씀하시면 자신에게 매어 놓은 것을 주님이 쓰시도록 내놓아야 합니다. 내가 드리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내가 드린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보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셨던 것은 예언의 성취(슥9:9)를 위함이었고,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치적 왕이길 기대 했지만 예수님은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우주를 구원할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많은 이들이 찬양했습니다.(36-38절) 찬양의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앞으로 더 많은 기적을 행할 것을 기대하며 소리높여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이 원했던 정치적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곧 돌변하여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이들의 찬양 동기는 잘못되었습니다. 주님은 찬양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어떤 동기로 찬양해야 하는 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도 잘못된 동기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찬양하는 이유가 예수님을 자신의 이기를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며 찬양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주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이기만을 위해서 찬양한다면 그 찬양의 동기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찬양해야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잘못된 동기로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예수님께 찬양하는 사람들을 책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약 제자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40)라며 바리새인들의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모든 만물로부터 찬양받기에 합당하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을 기쁨으로 찬양하며 진정한 왕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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