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눅11:29-36)

  예수님께서 말 못 하는 귀신을 쫓아내자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또 다른 표적을 구했습니다.(16절) ‘표적’은 어떤 것을 구별해 주는 기적적인 ‘증거’란 의미입니다. 그들이 표적을 구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나타낼 만한 기적을 보여 달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할 수 있는 기적을 충분히 보였는데도 그 능력을 아예 인정하지 않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하기 때문에 그들을 ‘악한 세대’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것이 없다.’(29절)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류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표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표적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니느웨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았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기적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기적보다 말씀이 더 귀한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했다.’고 말합니다. ‘남방 여왕’은 스바 여왕을 말합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의 말을 들으려고 많은 경비와 육체적 피곤을 겪으면서 먼 길을 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유대인들은 솔로몬보다 더 큰 예수님이 곁에 계신데도 그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느냐고 정죄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말씀을 더 귀하게 여깁니까? 아니면 기적을 더 귀하게 여깁니까? 혹시 하나님의 말씀보다 기적이 더 존귀하게 여겨진다면 그의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기적보다 더 귀하고 능력 있는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생명의 말씀보다 더 큰 표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적보다 말씀을 귀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표적을 구했는데, 예수님은 갑자기 등불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33-36절) 왜냐하면 그들의 불신앙과 편견 때문에 영적 시야가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은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빛은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눈에 이상이 생기면 아무리 밝은 빛을 비쳐도 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눈이 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의 지각과 이성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스스로 살펴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정죄 받고 있습니다. ‘사랑을 말하는데, 그 사랑은 어디에 있느냐?, 서로 용서하라고 하는데 왜 교회들이 그렇게 싸우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교회가 왜 정죄를 받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진리를 보는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보는 눈이 어두워서 전통과 형식만 붙잡고 있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말씀을 붙잡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는 눈이 온전한가를 잘 살펴서,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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