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자 하여(빌3:9-11)

  바울은 모든 것을 갖춘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스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랑거리였는데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그 자랑거리를 해로 여기고 모두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존귀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난 예수님은 그동안 바울이 만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가 새 생명(구원)을 얻었습니다. 그가 새 생명에 이르게 된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8-9절) 여기서 ‘의’(義)는 하나님과 사람 간의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그동안 바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율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됨을 알고, 이제부터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 그가 추구해 왔던 종교적 열심을 추구하지 않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더 갖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안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감을 통하여 더 친밀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부할의 능력’도 체험하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부활에 이르기를 갈망했습니다.(10-11절) 여기서 ‘주님의 부활의 능력’은 육체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힘을 말합니다. 즉 부활하셔서 우리들 삶 속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이 부활의 능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합니다. 바울도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 후, 전도 여행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심지어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그가 죽은 줄 알고 사람들이 성 밖으로 버리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주님처럼 살고자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온전히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했습니다.(11절) 바울은 그 부활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재림할 때 부활합니다. 그러므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완성은 부활입니다. 몸의 부활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자들이 미래에 얻게 될 영화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알고, 그의 부활과 고난에 동참하여, 주님의 부활에 이르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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