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기대와 소망(빌1:18-24)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20절) 여기서 ‘존귀하다’는 것은 ‘수를 증가시키거나 장식의 크기를 늘리는 것’으로써, 자신은 작아지고 그리스도는 커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라면 자신이 죽어도 좋고 계속 살아도 좋다고 고백합니다.(21절) 사는 것과 죽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될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든 삶을 다 버리고 전적으로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줄곧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제 죽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죽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유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떠나다’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풀다, 풀리다’라는 뜻입니다. 문제가 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사는 동안은 풀리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 주님 앞에 서면 모두가 이해되고 풀릴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희미하게 보이는 것들을 완전히 알게 될 것이며 선명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제약도 없이 이해하고 모든 것을 다 밝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떠나다’의 또 다른 의미는 이 세상의 육신을 벗고 영원한 거처로 옮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유한한 육신의 몸을 벗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이유로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훨씬 낫지만 ‘빌립보교회를 위해서는 사는 것이 낫다.’라고 판단했습니다.(22-24절) 빌립보교회에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좋은 것’과 ‘유익한 것’ 중에 유익한 것을 선택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것, 하고 싶은 것, 쉬운 것을 선택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좋은 것보다는 필요한 것, 유익한 것, 영원한 것을 선택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좋은 것을 선택하지 않고 인간의 유익을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왜 이런 삶을 추구했을까요? 그는 모든 것은 주님의 손에 달렸음을 철저히 믿었습니다. 모든 일은 주님이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내 삶의 모든 요구는 예수님 안에서 채워진다.’ 이것이 바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말에 담긴 의미입니다.

  바울이 기대하고 소망했던 일은, 오직 사나 죽으나 주님이 높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명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주님만 높임 받기를 소망하는 삶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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