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돌이켜 보시니(눅22:54-62)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체포되어 대제사장 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갔습니다.(54절) 예수님께로 부터 멀찍이 떨어진 이유는 언제든지 자기에게 불리할 때 도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서 불을 쬐고 있을 때,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예고하신 대로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를 고칠 때였다면 그때도 예수님을 부인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친밀함을 드러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의 처형에 놓이자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습니까? 단순히 자신의 불리함 때문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자기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탄이 밀 까부르듯이 공격할 것과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 했습니다.(33) 그래서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버린다 해도 자신만은 죽음을 불사하고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자신의 확신이 지나쳐 교만이 되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진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이 세상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습니다. 단지 인간은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아서 결국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자기 확신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확신하며 신앙을 고백합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끝까지 헌신하겠습니다.’라며 자신있게 고백하지만, 고백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헛된 자기 확신, 자기 자랑, 감당키도 어려운 약속 등 수많은 공허한 이야기를 참 많이 뱉어냈습니다. 아무리 힘써 결의를 다지고 확신해도 우리의 힘으로 우리 인생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늘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60절) 이는 예수님의 연민의 눈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연민의 시선과 마주했을 때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통회하며 자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윽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동안 우리가 불순종했지만, 주님은 기도하시며 끝까지 사랑으로 우리가 돌이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과 멀어졌던 자리에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