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눅13:10-21)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귀신들려 18년 동안이나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보셨습니다. 그녀는 허리가 꼬부라져 그 몸을 전혀 일으킬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11절) 이러한 여인을 예수님이 먼저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겨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여자를 고칠 때, ‘치료’라는 의미가 아닌 ‘자유’의 의미를 가진 ‘놓아주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안수하여 낫게 되자, 곧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13절) 마귀에게 매여 고통 가운데 있던 여자가 고침을 받는 순간에 비로소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안식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화를 냈습니다.(14절) 회당장은 이 여자의 병을 치료한 것, 자체에 대해서 분개한 것이 아니라, 병 고치는 일이 안식일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회당장은 한 사람의 구원보다 율법을 지키는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의 본질은 생명을 구원하는 날이요, 해방의 날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말씀을 왜곡했습니다. 그들은 사탄에 얽매여 고통받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율법 지키는 것만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짐승을 풀어내어 물을 먹게 했다면, 하나님의 딸을 매인 데서 풀어주는 것이 합당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15-16절) 예수님은 안식일에 소나 나귀를 풀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듯이, 사탄에 매여 있는 여인을 매임에서 푸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일에서 해방되는 것뿐만 아니라 갇힌 것에서,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신5:15)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짐승은 돌보면서 사람의 구원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늘 자기 소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셨습니다.(18-21절) 이 비유가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마태복음에서는 가장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로 자란다는 확장성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작은 씨에 초점을 두지 않고 나무가지에 깃드는 새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모든 민족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큰 백성이 되게 한다는 것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비유는 작은 시작과 큰 결과라는 대조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상징합니다. 누룩도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누룩이 반죽에 스며들어 새로운 어떤 것으로 변화시키듯이, 하나님에 의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성장과 확장이 아니라 생명과 변화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형식과 전통만 붙잡고 생명을 외면하다가 신앙의 본질을 잃고, 외식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점검해봐야 합니다. 교회의 성장에 집착하느라 한 생명의 소중함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외식하는 자요, 변질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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