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따르겠나이다(눅9:51-62)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기로 결심하셨습니다.(51절) 그리고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고자 했으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거절했습니다. 그때 요한과 야고보가 분노하여 사마리아에 불을 내려 심판할 것을 주님께 요청합니다.(54절) 그들의 분노는 예수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마을을 우회하여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56절) 요한과 야고보는 제자이면서도 제자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도하다가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혈기를 부리거나,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사사로운 감정은 제자의 도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제자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본문에 등장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살펴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자원했습니다.(57절)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결의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냉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58절)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많은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따르면 그의 미래가 보장될 것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생이니 나를 따르면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잘 믿으면 미래가 보장될 줄 믿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많이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의 삶을 보장하지 않지만, 내세는 확실히 보장합니다. 영원한 세상을 보장해 줍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다운 믿음입니다. 제자는 이러한 믿음으로 고난을 감수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는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고 그는 따르겠으나 아버지 장례를 치른 다음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59절) 사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사업을 좀 더 한 다음에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공부를 더 한 다음에 하겠습니다.’라고 핑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우선인 사람입니다. 핑계 대고 있는 사람에게 주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절)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육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입니다. 세상적(죽은 자)인 사람들끼리 장례를 치르게 하고, 제자는 복음 전파하는 것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사람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자원한 사람이지만 즉시 따르겠다고 하지 않고 가족과 작별한 다음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61절) 가족들과 상의하겠다는 뜻입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족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62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과거로 돌아가고,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쟁기를 잡았으면 앞만 보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헌신하겠다고 했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을 향해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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