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받으십시오(빌3:17-19)

  바울은 예수님은 만난 후, 주님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일, 즉 새 생명을 부어주신 주님만을 붙잡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을 살아가겠노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아’ 함께 달려가자고 권면합니다.(17절) 나를 본받으라는 말은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본으로 삼고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고전11:1) 바울의 과거는 율법과 세상의 본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본으로 삼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빌립보 교인들도 세상의 본을 따르지 말고 내가 본을 삼은 것처럼, 예수님을 본받아 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바울 자신이 헛되게 살았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생애 전체를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자신의 신앙을 본받아 살 것을 권면하고 있는 걸까요? 그 이유를 18-19절에서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8절)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하신 일의 가치를 멸시하거나 그 일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가볍게 여기고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의 원수들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기독교를 자신의 영달을 위한 도구로 삼는 이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세상적 욕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9절에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배를 하나님으로 삼았습니다.(19b) 여기서 ‘배’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육체의 욕망을 우상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체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았습니다.(19c) 그들은 자랑이 아닌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것이 영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땅의 것만 생각했습니다.(19d)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세상의 삶이었습니다. 하늘의 백성으로 하늘의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들은 땅의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19a) 그들은 황당한 결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들이 신뢰하고 자랑했던 신앙이 십자가의 원수로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관련 없이 하는 종교 행위는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삶이 아무리 화려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을지라도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자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롬12:2) 또한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골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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